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늙은 여승은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대답했다.”얘! 정말로 신영시자가 나타난다면 그때는 이 스승의 힘

으로 어쩔 도리가 없을 게다. 그러나 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자비심을 빌어서라도 모든 일이 무서운 결과

를 가져오지 않도록 힘써 보는 것뿐이다.”늙은 여승은 말을 마치자, 회색 무명으로 만든 승복 소맷자락

을 한 번 가볍게 휘두르더니 한줄기의 엷은 연기처럼 어디론지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.그날 밤봉명장에

는 등불이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다.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 같은 정밀(精密)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.

봉명루 누각 위에 있는 금봉의 아가리에는 또 하나 새로 구한 야광주가 물려져 있었다. 그것도 역시 하

얗고 어슴푸레한 광채를 발산해서 누각 지붕 꼭대기를 환하게 비춰 주었다.봉명장의 건축 구조는 보통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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건물과는 완연히 달랐다. 전면으로 있는 삼중(三重)의 넓은 뜰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,

후원으론 십이성신(十二星辰)의 방위를 따라서 봉명루를 둘러싸고 열두 군데 따로따로 독립되어서 떨

어진 작은 뜰들이 있었다. 이 하나의 뜰마다 열두 금비녀가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.봉명루는 열두 뜰 맨

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. 사방엔 여기저기 꽃나무들이 무성해서 향기를 풍기고 있건만, 역시 죽음 같은

적막이 넓은 공간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고, 봉명루에서 곧장 서쪽으로는 높은 담으로 막혀져 있는

뜰 한편으로 있는 불당의 외짝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. 늙은 부인 하나가 손으로 염주를 만지작거리며

천천히 걸어 나왔다. 불당 문밖으로 나선 그 늙은 부인은 오르내리는 계단 앞에 조용히 서서 꼼짝도 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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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 않았다. 하늘 위에 갈고리처럼 떠 있는 초생달을 유심히 쳐다보고만 있었다.이때, 전신에 초록빛 옷

을 입은 계집종 하나가 사뿐사뿐 조용히 걸어서 늙은 부인의 신변 가까이 왔다.나지막한 음성으로 조용

히 말했다.”마님 ! 잠깐 앉으셔서 쉬실까요?”늙은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대답했다.”그래 !

좋도록 하자.”초록빛 옷을 입은 시비는 불당 오른편에 있는 조그만 방사(房舍)안에서 대나무 의자와

찻상 하나를 옮겨 내다가 계단 앞에 놓았다. 또 한 번 돌아서서 저편으로 가더니, 향기가 그윽하게

풍기는 찻주전자 하나를 찻상 위에 갖다 놓고, 상 위 향로에 단향(檀香)을 꽂아 불을 붙였다.이 늙은

부인은 언제나 염불이 끝나면 계단 앞에 앉아서 잠시 쉬다 가는 모양이었다.계단에서 몇 장(丈)쯤

떨어진 먼 곳엔 수십 그루의 대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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